산에는 그림자가 있다
장마철이다. 잠자리에 누우면 ‘쏴와아 쏴와아’ 하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괙괙괙 괙괙, 괙괙 괙괙괙’ 하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밤새도록 이어진다. 도심이라서 그런 걸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마치 사나운 거위 소리를 닮았다. 산자락 아래 위치한 아파트는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덕분이다. 장마철이면 아파트 남쪽 계곡으로 물이 흐르는 것이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꽤나 줄기차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더불어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 가까이 계속될 때도 있다.
산은 가깝고도 먼 대상이었다. 고향인 충북 진천은 산골인데다 집 뒤편이 바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대구 생활은 한동안 산과의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던 30대 중반 어느 날 직장에서 등산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산은 만만한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생각만으로 오를 수 있는 실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중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노란 하늘에서 검은 절망과 푸른 오기를 함께 보았다.
사십 줄에 들어선 90년대 초였다. 범물동 용지봉 아래 아파트에 정착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산과의 만남으로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테니스가 한참 유행하고 있었다. 딱히 등산을 택한 것은 혼자 자유롭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새벽 등산은 1년이 지나자, 10년 넘게 끌어오던 십이지장궤양에서 거짓말처럼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처럼 등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산은 신뢰를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50대 후반 엄지발가락에 통풍이 찾아왔다. 과도한 술과 때로 거르는 새벽 등산 틈새를 용하게 찾아왔던 것이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이내 낫겠지만 복용의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약에 구속되는 현실이 싫었다. 새벽 등산 시간을 배로 늘려 잡았다. 그렇게 3일을 걷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기가 가라앉았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벌겋게 퉁퉁 부어오른 발은 등산화를 신을 때에도, 작은 돌멩이에 부딪칠 때에도 깨어지는 통증으로 어금니를 악물어야만 했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을 산은 단 3일 만에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산은 겸허와 순리를 깨워 준다. 꼿꼿이 서서 산을 오를 수는 없다. 얼굴과 산길이 평행이 되어야 힘들지 않은 것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어깨와 고개를 숙여야 되는 이유다. 한 발 한 발 산길을 오르다 보면 뜨거운 숨결은 어느새 가슴을 지나 아랫배에 다다라 있다. 올라갈 때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의 힘겨운 바위는 내려올 때면 소년의 생기로 가득해진다. 그렇다. 어쩌면 매 순간 우리는 삶, 그 양면의 경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과 골은 철마다 달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연둣빛 아지랑이가 검은 숲을 감아 도는 삼월, 산은 긴 잠에서 깨어난다. 팽팽한 산릉이 저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오월은 숨막히는 전율이다. 바람은 또 어떠한가. 오월의 산에는 흐벅진 바람이 골을 따라 흐른다. 통통하게 살찐 바람이다. 유월이 되면 숲 속에는 밤느정이 냄새, 누룩 익어 가는 냄새가 온통 진동을 한다.
칠월이면 우듬지에 연녹색 새순이 다시 돋아난다. 직각의 태양 아래 녹음의 절정이 새롭게 완성되는 것이다. 팔월의 해는 연중 사납다. 풀잎은 창날처럼 날카로워지고 나뭇잎은 솥뚜껑처럼 두꺼워진다. 매미 소리 끊긴 황량한 구월의 숲은 시월이 되면 단풍과 낙엽으로 어수선해진다. 그리고 십일월이 되면 짐짓 단정하고 숙연해진다. 봄의 숨소리를 듣는 구도자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의 매몰찬 바람이 한동안 골과 골을 메운다.
용지봉은 해발 630여m에 이른다.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야산으로 부르기에는 골이 깊은 산이다. 만년설 덮인 에베레스트나 킬리만자로, 백두산과 지리산에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용지봉은 분명 산 속의 산이다. 골 따라 바람이 흐르고 산새와 너구리, 다람쥐와 멧돼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다. 당당하고 의연하게 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으로 자연의 섭리와 의지가 숨어 있는 곳이다. 진실 그대로 낮에 부는 골바람과 밤에 부는 산바람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곳이기도 하다.
선택의 기로에서 번민에 싸인 적이 몇 번 있다. 언제나 절박하고 중차대한 시점이었다. 그때마다 산을 찾았고 산에서 답을 얻었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스스로 신뢰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작은 일은 누구에게나 충고와 조언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일은 아무에게도 충고와 조언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산은 정직하고 냉정하다. 산은 걸은 만큼 숨소리가 깊어진 만큼, 땀을 흘린 만큼 바람 소리와 산새 소리를 들은 꼭 그 만큼 가슴을 열어 주는 것이다.
산은 무모하거나 편협하지 않다. 그렇다고 비굴하거나 초라하지도 않다. 언제나 적요의 의연함과 의표를 찌르는 단호한 격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산은 산일 뿐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항심일 수는 없다. 단언하건대 용지봉에서 얻지 못한 전설을 에베레스트와 백두산에서 얻을 수 없다. 또한 용지봉에서 찾아내지 못한 역사를 킬리만자로에서 지리산에서 찾을 수도 없다. 만년설이 없어도 천 길 낭떠러지의 아찔함이 없어도 산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더 깊숙이 산 본연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 산은 꼭 느낀 그 그림자만큼만 스승이 되어 주는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