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를 바라보는 시선
방송대학교 마지막 학기에서였다. 농학과 원예학을 수강하며 막연하게 자리 잡고 있던, 꽃꽂이에 대한 환상(環象)이 드디어 확연하고 구상(具象)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꽃꽂이는 꽃의 자연미에 디자인 원리를 적용하여 미적 가치와 공간 기능을 확장하고 ― 정서를 안정시키는 심리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데, 동양식 꽃꽂이와 서양식 꽃꽂이는 여러 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나타낸다.
동양식은 선과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선 디자인 형식이다. 침봉과 곡선의 목본류를 사용하는 천지인(天地人) 3주지의 삼각 비대칭 조화로서,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는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에 비해 서양식은 원, 삼각, 원추 등 기하학적 구도의 색감과 입체미를 강조하는 덩이 디자인 형식이다. 플로럴폼(floralfoam)과 직선의 절화와 절엽을 사용하는 사방화(四方花)의 상하좌우 대칭 구도로서,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는 상업적 대상이다.
하오의 햇살이 눈부시게 맑다.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출입문이 활짝 열리면서 대여섯 명의 여자아이들이, 흐벅진 오월의 바람을 한아름씩 끌어안고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어깨에 멘 커다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그네들은 중앙의 큰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돼지갈비를 마구마구 뜯으며 왁자지껄 대화를 이어갔다. 입술 주변에 침과 양념이 덕지덕지 번졌으나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은 생동감이 넘쳤고, 탱글탱글한 허벅지는 금방이라도 핫팬츠 추리닝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인근 여자중학교 조정(漕艇) 선수라는 그네들은 ― 서양식 꽃꽂이의 꽉 찬 입체적 아름다움, 청춘 바로 그 자체였다.
눈과 표정이 그윽하게 맑았다. 나긋하면서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스님의 입가에 유아(幽雅)한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얼마쯤 지났을까. 세납 이순이 넘어 보이는 스님의 얼굴이 언뜻 비구 스님처럼 보인다. 아니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냥 중성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관세음보살상도 알게 모르게 중성의 얼굴이 아니던가. 갈망과 애욕, 세파의 군더더기들을 모두 내려놓은 ― 은연중 동양식 꽃꽂이의 여백을 살며시 짚은, 성(性)과 속(俗)을 벗어난 성(聖)스러운 아름다움이다.
스님 얼굴에 문득 오순 후반의 아내 얼굴이 겹쳐진다. 두루뭉술한 스님 얼굴에 덧씌워진 갸름한 아내 얼굴은 적이 윤곽이 완만해진다. 그런데 눈가의 잔주름과 코에서 입가로 내려온 팔자주름이 ― 동양식 꽃꽂이의 선에서 추구하는 바로 그 여백의 미가 아닌가. 그랬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시듬이 아니라 ― 서양식 꽃꽂이에서 보여주는 힘차고 강렬한 느낌의 팽팽함에서 단아한 한 폭 동양화로 대치되는 ― 여여함을 생성하는 동양식 꽃꽂이로의 전환이자 진화였던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