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사슴을 말이라고 부른다
환갑을 이틀 앞둔 한 여인이 생을 마감했다. 거실 온도가 연일 37도까지 올라가는 등 가마솥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가운데임에도,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접하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쳐갔다. 폐암으로 인한 자연사였으나 투병 중에도 ― 백 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잔 다르크(Jeanne d’Arc)에 비유한 ‘정 다르크’로 불리며 ― 태극기를 높이 들고 당당히 촛불에 맞서 싸운, 그녀의 당차고 의연하며 이지적이고 정의로운 이력 때문이다.
‘자신의 날개로 날 때 아름답다’ ― 그의 자전 에세이 제목이다. 걸맞게 경력 또한 화려하고 다채롭다. 1988년 서울올림픽 메인 캐스터로 KBS를 대표하는 여성 아나운서였으며, 서울시 최초 홍보 담당관과 의전담당 비서관, 대한애국당 사무총장과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자신의 신념과 국가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깊은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능소화는 한여름 뙤약볕 속에 피는 꽃이다. 종 모양의 주황색 꽃은 질 때 더 처염하게 아름다워 ― 시들지 않은 상태에서 뚝뚝 떨어져 내려 ―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가녀려 보이는 정미홍(鄭美鴻)의 모습에서 문득 능소화를 연상한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불굴의 기상과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종북 좌파 인사들과 종횡으로 설전과 송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난해 여성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대통령 탄핵 심판이 인용된다면 목숨을 내놓겠다.”라는 초강경 발언으로 여러 차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어떻든 그녀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다.
대비되는 죽음이 있다. 그보다 이틀 앞서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 드루킹 관련 범죄에 연루되어 특검 소환을 앞두고 있었다 ― 자살한 좌파 국회의원이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범법자에게 뇌물을 받고 ― 자당에서조차 출당 위기에 몰리는 등 최악의 상황에 이르자 ― 할 수 없이 자진하여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졌다. 이십 몇 년 만에 찾아온 초특급 폭염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은 국회의원이 부활한 것이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벌거숭이 황제’가 되어 나타났다. 각종 언론 매체들이 ― ‘국회장’답게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근조화환이 365개나 놓였고, 5일간 3만8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다는 등 ―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앞장을 서서 분위기를 띄웠다. 곧이어 삼부 요인이 나서서 황제의 관(冠)에 앞다퉈 띠를 두르자, 청와대 고위 관료들과 전·현직 국회의원 등 좌파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 정의로운 그를 따르고 배우겠다며 오열과 통곡을 하면서 ― 줄줄이 망토와 옷자락을 받쳐 들었다. 뒤질세라 좌파를 추종하는 언론인·연예인 등이 무리를 지어 추모방송과 추모제를 한다며 꾸역꾸역 망토 끝자락을 차지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실상을 ― 황제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라는 사실과 그들 또한 허공을 부여잡고 망토와 옷자락을 받쳐 든 것처럼 쇼(show)를 하고 있다는 것을 ― 지극히 잘 알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도 똑같은 죽음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의 소환을 앞두고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그도 ‘벌거숭이 황제’가 되어 폐족으로 내몰려 다 죽어가던 좌파들을 살려냈다. 그때도 좌파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 보이지도 않는 망토와 옷자락을 받쳐 들고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 ‘국장’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 아마도 그가 투신자살을 하지 않았으면 현 정권은 애당초 잉태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더욱 가관인 것은 하나같이 숨죽인 우파 인사들이다. 그래도 두 사람이 나서서 겨우 체면치레는 했다. 한 사람은 페이스북에 ― 미국에 갔을 때는 뇌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가 유서에서는 인정을 하고, 드루킹 특검 법안을 적극 반대한 모습에서 ― 좌파 정치인의 이중성을 본 것 같아 애잔하다는 말을 남겼다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는 혹평을 듣고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또 한 사람은 페이스북에 ―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지 자살은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며 ― 어떤 경우라도 자살이 미화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고 했다가, 막말의 극치며 잔혹한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이라는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에 그는 같은 말을 해도 좌파들이 하면 촌철살인이라고 미화하고, 우파들이 하면 막말이라고 비난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며 다시 반박을 했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다만 언(言)이 행(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자못 아쉽다.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넘어 처량한 죽음도 있다. 좌파 국회의원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날 포항에서는 해병대장(葬)의 영결식이 ― 마린온 헬기 추락 사고로 해병대 장병 5명이 순직을 했다 ― 거행되었다. 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애도를 함께한 것과는 달리 좌파 진영에서는 ― 그들은 팔각모의 귀신 잡는 해병들로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최정예 요원이었다 ― 단 세 사람이 조화를 보낸데 이어 마지못해 두 사람이 참석을 했다. 청와대에서는 달랑 비서관 한 명이 뒤늦게 영결식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저지를 당하는 수모를 감수하기도 했다.
현 정부는 목하 ‘적폐 청산’중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를 위시한 좌파들의 인식이 ― 마린온 헬기 사고 해병대 장병들의 영결식에 그처럼 무관심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 퍽이나 혼란하고 당혹스럽다. 하기야 역대 좌파 정권으로부터 이어져온 ―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영결식과 추도식은 아예 도외시되어 왔다 ― 전통이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람선을 타고 놀러가다가 죽은 사람들과 낚싯배 타고 생선회 먹으러 가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책임이라며 십수억 원씩 보상을 해 주고, 순직한 해병대원들에게는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지 않는 비틀어진 양심과 가치관의 전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정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가 ― 조정에 신하들을 가득 모아 놓고 ― 2세 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겼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조고의 위세에 압제 되어 그 말에 동조를 하였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꼭 그러하다. 촛불과 깃발과 나팔과 꽹과리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에 짓눌려 ― 우리는 지금 사슴을 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중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