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시방 트로트 열풍 한가운데 있다. TV CHOSUN에서 미스터트롯 톱7을 선정하고 막을 내린 후, 연이어 미스트롯 톱7을 선발하기 위한 경연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예능 프로그램 등에 비교적 둔감한 아내와 난 뒤늦게 재방송을 보며, 진(眞)으로 선발된 임영웅의 비감에 젖은 감성적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단세포적 가사와 리듬의 산만성 등으로 본래 취향에서 벗어나 있던 트로트가 단번에 그 고정관념을 깨트렸음이다. 절절하고 절박하며 애절하기까지 한 ― 마스터인 원곡자마저 스스로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는 ―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디며 부단히 노력해왔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영웅은 누구인가. 사전에서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피상적으로 지혜와 재능, 용맹 등은 차치하고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평하면 될 것 같다. 임영웅이 그랬다. 서른을 갓 넘긴 그가 어느 날 부지불식간, 자타 공인 선망의 대상으로 불쑥 떠올랐다. 그는 그렇게 2020년대 초 ― 코로나19로 명명된 우한 폐렴의 팬데믹 한복판에서 ― 대한민국의 트로트 영웅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영웅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 손을 잡고 논둑길을 걸어가면 세상에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없었다. 뙤약볕도 뜨겁지 않았으며 소낙비도 대수롭지 않았다. 벼 포기를 내려다보며 ‘고개 숙여’하면 벼가 고개를 숙였고, 벼이삭에 매달려 있는 메뚜기에게 ‘움직이자 마’하면 메뚜기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살랑대던 바람마저 쥐 죽은 듯 숨을 멈췄다.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 난 언제 영웅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몇 가지 일화가 스쳐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웅변을 했던 일,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일, 행정병으로 근무 당시 십여 명 중 유일하게 대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음에도 주눅 들지 않았던 일, 시월 유신 찬반 투표에서 중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대에 기표한 두 명에 포함된 일, 군대 영창에서 2분여 만에 영창 수칙을 모두 외웠던 일, TO가 둘뿐이었던 직장 승진 시험 당시 TO가 하나뿐이라도 자신한다고 큰소리치며 합격한 일, 직장 초급 간부 시절 본부장의 부당한 처사에 불응하여 바로 잡은 일, 정년퇴직 후 웹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일 등등이 그나마 자신만의 영웅이라면 영웅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는 속담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남달리 강한 집념과 오기로 이름 앞에 천하라는 단어를 부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낯 뜨거운 민망함이자 아전인수식 발상이다. 어쩌면 장자(莊子) 이야기도 같은 맥락일 수 있겠다.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 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일면 수긍이 가면서도 거부감이 든다. 개구리나 메뚜기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생과 아무 상관도 없는 바다와 얼음을 알아야 된단 말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을 꿈꾼다. 이어지는 삶과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임영웅식 영웅을 희원하며, 하다못해 자기만의 영웅이라도 간절히 고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서 인간에게는 타고난 변명과 자기 합리화의 무기로 좌절과 무기력에서 견뎌 내는 일상화의 묘계가 주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뒷짐을 지고 걷는다.
똑같이 짧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새벽에 일어나 3시간 남짓 산행을 하고 돌아와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면서 청소를 한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낮잠을 한잠 자고 나면 이내 점심을 먹어야 한다. 두세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 장사익과 야운의 노래 몇 곡을 번갈아 들으면서 ― 책을 읽거나 글쓰기를 하다 보면,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어두워져 있다. 거실로 나와 막걸리를 마시거나, 아내의 심부름을 하거나,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때맞춰 저녁을 먹어야 되고 어영부영 자정이 가까워지면 당연한 듯 잠자리에 든다.
청춘 시절 하루는 참으로 길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동생에게 넥타이 매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늘어지게 낮잠을 한잠 자고 일어나도 해는 아직 중천이었다.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빠진 걸까. 종심(從心)의 하루는 아주 빨리 지나가고 한 달은 늘 한달음에 넘어가 버렸다. 영웅은 고사하고 극히 진부하고 나태하여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허둥대고 있음이다.
다시 산길을 걷는다. 문득 물소리를 따라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듣는다. 사유가 깊어진다. 그렇다. 여유가 없다는 것은 무언가에 구속되어 있음이다. 아내의 심부름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때때로 글을 읽고 쓰는 일들이 왜 여전하고 태만하단 말인가. 이제는 내려놓은 허허로움이 진정 소중하고 아름다울 때, 시간에 종속되지 않은 생이라면 그게 바로 영웅의 시간들이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영웅 중 한 사람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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