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 모임에 다녀왔다. 코로나19 발발 후 거의 3년 만이다. 백여 명 남짓 동기생들 중 남자가 이십여 명쯤, 여자가 십여 명 가량 모였는데 그중에는 53년 만에 처음 얼굴을 대하는 친구도 있었다. 점심 식사와 노래방, 저녁 식사까지 이어지는 동안 ― 연륜이 연륜인 만큼 치기와 과시보다는 ― 배려와 속정이 묻어나는 애애(靄靄)하고 꾸밈없는 자리였다.
저녁 식사를 하며 마주앉은 동기 회장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난 유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진천군이 내리 좌편향 인사가 당선된 지역으로 이름을 올렸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몇 안 되는 토박이 중 일원으로 향토 사랑이 대단한 뚝심의 사나이였다. 소주잔을 비우는 내내 둥근 눈을 크게 뜨고, 시나브로 변질된 향리 분위기에 대한 서운함과 걱정을 가감 없이 토해 냈다.
광혜원 중학교는 충청북도 진천군 동북단에 위치한다. 지금도 삼개 군, 오개 면의 초등학교에서 동량지재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 안성군과 작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둔 입지 조건 등으로, 진즉에 공업화 물결을 탔고 거주민들도 급격하게 외지인들로 대체되었다. 본토박이가 10%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현지 정서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지시식변(知時識變)과 수시변역(隋時變易)은 주역의 근본 이치다. 계절의 순환에 맞게 변할 줄 알아야 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뀔 줄 알아야 되는 순리를 설파하고 있다. 향토는 이미 근본 이치에 맞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데, 동기 회장만이 애면글면 초사(焦思)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우가 문득 머리를 스쳐간다.
걱정에 대하여 이채로운 견해를 밝힌 사람이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자신의 저서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걱정의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22%는 쓸데없는 사소한 것이고, 4%는 날씨처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며, 마지막 4%만이 걱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주장을 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96%의 시간과 에너지를 걱정에 매달려 할애하고 낭비한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고 한다. 참뜻이야 어떻든 진천에서 살아야 된다는 ―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지난날부터 진천이 그만큼 반듯하고 정의로우며 양심과 신의를 바탕으로 하는 슬기로운 고장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며, 추후에도 영속성 진리로 널리 회자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생마중 불부이직(蓬生麻中 不扶而直)이라는 말에 무게 중심을 싣는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말로 꾸불꾸불하게 자라는 쑥대도 삼밭 가운데에서는 저절로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상금은 외세 등 영향으로 일시 본래의 빛깔과 시류를 잃었더라도 저변에 깔린 생거진천의 본 기류야 어디 가겠는가. 머잖아 되찾을 참모습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잇큐(一休)는 우리나라 원효대사에 비견되는 일본의 고승이다. 평소에도 "받을 건 받아야 하고 치를 건 치러야 된다."면서 인과를 강조한 그는 입적하기 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 정말 힘들 때 펴 보라며 ― 봉투 하나를 남겼다. 수년 후 위기에 봉착한 제자들이 펼쳐 본 편지에는 "걱정하지마라. 어떻게든 된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라는 짤막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세상에 그치지 않는 비는 어디에도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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