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末伏)을 하루 앞두고 비가 내리고 있다. 이미 입추(立秋)가 지났으니 가을비라고 해도 괜찮겠다. 아직은 폭염과 열대야 기세가 등등한 대구의 햇살 잦아든 하늘에서 마치 가을비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것이다. 안개비에서 가랑비 사이를 오가는 ― 겨우 도랑을 적시는 ― 정도에 지나지 않으나, 어젯밤 자정 무렵부터 오늘 한낮이 기울도록 내처 내리는 비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해서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말매미 울음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그 작은 빗소리에 애써 귀를 쫑긋 세워 본다.
대구의 장마는 진작에 끝나 버렸다. 비 다운 비 한 번 제대로 뿌리지 않고 끝나 버린 여름 장마는 운문댐 저수율을 25%대로 떨어뜨렸고, 동구와 수성구에 공급하는 운문댐 급수를 낙동강 수원지로 교체해야 되는 시점에 까지 이르렀다. 중부 지방에서는 국지성 호우의 물 폭탄 세례로 연일 호우 주의보와 호우 경보가 발령되고 있다. 특히 청주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무심천이 범람하여 여기저기 수해가 속출하는 뉴스를 보며 ― 물 폭탄이라도 한 번 맞아 보았으면 하는 ―아이로니컬(ironical)한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 7월 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시험 발사로 촉발된 미국과 북한의 대치는 ― 흡사 치킨 게임처럼 ― 하루하루가 다르게 그 강도를 높여 가고 있다. 미국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북한 정권의 종말과 국민의 파멸을 경고하자, 북한은 괌(Guam) 주변 30~40km 해상에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4발을 발사한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공개하며 강하게 맞섰다.
“전쟁은 없다. 한반도 위기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 상황에 대한 청와대의 진단이다. 당연히 현 시국에 대한 우려나 국민들에게 위기 대처 방안 등을 거론하는 위정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 종합편성채널의 일부 패널들만이 한반도 위기설을 제기하는 정도여서 ― 광복절 연휴를 맞자 기다렸다는 듯 전국의 고속도로는 구간 구간마다 심한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식적 북한의 위협에 익숙해져 차분하다.” 미국 CNN 방송이 보도한 여름 관광지 괌의 주민들 표정이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 내에서는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데 반해, 한국인들이 의외로 차분한 반응을 보이는데 대해 매우 놀랍다는 반응을 전했다. 정말 차분한 걸까. 그렇지 않다. 국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괌 주민들 표정이 차분한 것은 맞겠으나 한국인들은 아니다. 단지 안전 불감증에 젖어 북한의 위협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이다.
국론 분열 현상은 보다 심각하다. 어쩌면 민족적 개념이 설정되지 않았다는데 그 문제의 파급성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가늠되지 않으나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덕행과 만행보다는 호불호(好不好)가 판단의 기준으로 정립되는 사고가 대한민국에 팽배한 까닭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불의, 악, 만행이라도 괜찮고 ―/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면 정의, 선, 덕행이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적폐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이라도 같은 맥락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체념의 방관자적 입장으로, 어떤 사람들은 양시론(兩是論)과 양비론(兩非論)을 오가는 기회주의자적 입장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맹종과 맹신의 촛불을 치켜든 동조자적 입장으로 대별된다. 문제는 국민의 절반쯤과 득세가 중 열에 여덟아홉이 맹종과 맹신의 동조자적 입장이라는 데 있다. 정점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마을의 일부 주민들이다. 과연 그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사드(THAAD)에 대해 그처럼 심도 있고 해박한 지식을 체득했단 말인가.
미생(尾生)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다. 그는 신의가 두터워 한번 한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켰는데, 하루는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정한 시간에 여자가 나타나기 전,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났으나 ― 다리 위로 피하지 않고 ― 미생은 그대로 버텼다. 마침내 그는 교각을 끌어안고 죽었다. 맹종과 맹신에 빠져든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슬프게도 미생지신(尾生之信)의 나라다.(끝)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개의 축(軸) (2) | 2023.03.09 |
---|---|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별이 빛난다 (1) | 2022.09.03 |
우리는 지금 사슴을 말이라고 부른다 (0) | 2022.08.10 |
어느 바보를 위한 도이(禱爾) (0) | 2022.08.10 |
징비록(懲毖錄)이 없어 나라가 망한 게 아니다 (1) | 2022.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