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진(後進)에 드리는 글 ―
“옷깃만 스쳐도 전세의 인연”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만리장성을 쌓아도 인연이 아닐 수 있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다. 그랬던 것이 정년퇴직을 얼마 앞두고 ‘그렇지 않다. 옷깃만 스쳐도 전세의 인연이라는 속담은 정말 맞는 말이다.’로 그 생각이 바뀌었다. 마주하는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이 새삼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7월 나는 환갑을 맞았다. 정말 나이가 든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관되게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만 고수하던 내가 때로 이방원(李芳遠)의 하여가(何如歌)에도 관심이 가고, 조선(朝鮮) 초 계집종들의 싸움에 대한 황희(黃喜) 정승의 탁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중용의 도(道)와 조화의 미(美)에 어느 정도 여백이 생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다.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본다는 뜻으로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오(吳)나라의 장군이었던 여몽(呂蒙)은 군주 손권(孫權)으로부터 학식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자, 군무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밤낮으로 학문에 열중했다고 한다. 얼마 후 만난 대도독 노숙(魯肅)이 그의 식견에 깜짝 놀라자, 여몽은 선비는 사흘을 떨어져 있다 만날 때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한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누군가를 대할 때 “저 사람은 ○○ 출신이야.”라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한다. 그렇지만 그 느낌이 매번 똑같지는 않다. 손이 따뜻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으며, 손길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고 억센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베이컨(Bacon, Francis)의 신귀납법이라는 논리학에 의하면, 그러한 생각과 느낌은 우리 인간의 왜곡된 편견에서 오는 절대적 오류라고 한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기준이 일률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좀 더 중도의 시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오늘 또 하루가 간다. 하루가 간다는 것은 하루 더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삶이 하루만큼 짧아지고 죽음이 하루 더 가까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시 구절을 즐겨 인용한 맥아더(MacArthur, Douglas)의 말에 의하면, 단순히 오래 산다고 해서 사람이 늙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6·25전쟁 중에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트루먼(Truman, Harry Shippe)에게 해임 당한 맥아더는 미 의회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군가의 후렴구가 맥아더에 의해 세기의 명언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맥아더는 “사람이 늙어 가는 이유는 목적과 이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할 뿐 영혼마저 주름지게 하지는 못한다. 영혼을 흙으로 되돌리는 것은 긴 세월이 아니라 의심, 두려움, 절망 같은 것들이다. 믿는 만큼 젊어지고 의심하는 만큼 늙으며, 자신감을 갖는 만큼 젊어지고 두려워하는 만큼 늙으며, 희망하는 만큼 젊어지고 절망하는 만큼 늙는다. 늙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의지와 사고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나이가 많다는 건 자랑이 될 수 없으나 부끄러운 건 더더욱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목표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패기 그리고 그에 상응한 집념과 도전 의식일 것이다. 나는 오늘 제2의 인생 설계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2014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생명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 수명이 82세라고 한다. 남자가 79세, 여자가 85세다. 이제 정년퇴직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흔히 회자되는 ‘구구 팔팔’이라는 말을 현실로서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방안으로 모색하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만큼 세상은 벽이 없어지고 직종은 세분화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 이외에 무언가를 시도하기란 그렇게 만만한 현실은 아니다. 맥아더의 말처럼 목적과 이상을 언제나 잠재의식 속에 잊어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하여 각자 나름대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특히 젊은 층이 운동에 열심인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건강을 챙기기 위한 운동을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오늘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첫 번째는 해리 리버만(Harry Lieberman)이라는 사람이다. 해리 리버만은 폴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다. 그는 29살 때 단돈 6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해리 리버만은 77살 때 은퇴 이후 노인클럽에서 잡담과 체스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가 81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멍하니 혼자 앉아 있는 그를 자원봉사자가 미술실로 안내했다. 체스 상대자가 몸이 불편하여 나오지 못한 것이다. 태어나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았던 그에게 그림은 그렇게 다가왔다.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은 해리 리버만은 그림에 푹 빠져들었다. 그는 그렇게 겨우 10주간의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해리 리버만에게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그림에 대한 천부적 소질이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원시적인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이다.” 많은 미술가와 평론가들이 해리 리버만의 그림에 대하여 내린 극찬이다. 그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현재 시애틀 미술관(Seattle Art Museum)과 마이애미대학 미술관(Miami University Art Museum)등에 그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101살 때까지 22번의 전시회를 개최한 해리 리버만은 1983년 103살이라는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는 101살의 마지막 전시회 때도 입구에 꼿꼿이 서서 400여 명의 내빈을 맞을 만큼 정정했다고 한다.
가끔 생각해 본다. 만약 체스 상대자가 아프지 않았거나 자원봉사자가 그를 미술실로 안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자원봉사자가 해리 리버만의 천재성을 알아챈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는 정말 우연한 일로, 우연한 기회에 생긴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두 번째는 시바타 도요(柴田トヨ)라는 여성이다. 시바타 도요는 일본의 늦깎이 할머니 시인으로 2013년 1월, 102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녀는 젊은 시절 여관 종업원과 요리점 허드렛일, 재봉일 등을 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사(詩)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92살 되던 해였다. 나이가 들어 유일한 취미인 일본 무용을 못하게 되자 아마추어 시인인 아들이 시 쓰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 후 94살 때부터 산케이(産經)신문의 ‘아침의 시’ 코너에 투고를 시작했고, 99살 되던 2010년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판하게 된다. 60대 이상의 여성 독자층에 힘입어 단숨에 1만 부를 돌파한 시집은 지금까지 150만 부를 넘어서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2011년 9월, 100살 된 기념으로 출판한 두 번째 시집 ‘100세’는 사전 예약만 30만 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성공은 잔잔한 감동의 전달에 있다. 물론 100살 된 할머니라는 삶 자체가 감동이고 용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노인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100살 할머니 시인은 분명 신선한 충격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60·70대 노인들은 물론 80·90대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나도 할 수 있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시 두 편만 소개해 보자. “약해지지 마//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비밀//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여덟에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 보고 싶은걸”
세 번째는 김학철(金學鐵)이라는 사람이다. 김학철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다.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으로도 불렸던 그의 본명은 홍성걸로, 자신의 독립운동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이 일본군에게 화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개명을 했다고 한다.
김학철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았고,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읽고 빼앗긴 땅을 총으로 찾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졸업 후 어머니와 여동생 때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학철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홀로 우뚝 비켜서는 자다.”라는 구절을 책에서 읽고 중국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학철은 의지와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원이 된 그는, 다시 장개석(蔣介石)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Marx主義)에 심취하게 된다. 이후 조선의용대의 분대장이 된 김학철은 25살 때인 1941년 일본군과 태행산 전투에서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3년 가까이 피고름을 흘리는 고통과 또 싸워야 했다.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한 김학철은 슬퍼하는 여동생에게 “사람은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니 한쪽 다리가 없어도 괜찮다.”라는 편지를 보낸다. 김학철의 나이 29살 때의 일이었다.
김학철은 해방과 더불어 총 대신 펜을 들었다. 조선의용대 시절 헝가리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페퇴피 샨도르(Sándor Petőfi)의 시(詩)를 읊으며 독립의 의지를 다졌던 그는,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다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항일 전투 중 사살한 한국인 학도병(일본군) 배낭에 있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김동인(金東仁)의 단편소설은, 민족적 비애와 함께 그의 문학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처럼 독립운동가 김학철은 독립 의지 못지않게 문학적 잠재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김학철의 생애는 순탄하지 못했다. 한쪽 다리까지 잃어 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는 남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유로, 북쪽에서는 연안파(延安派)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 중국으로 귀화한 이후에도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24년 동안이나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강제 노역 기간 중 모택동(毛澤東)의 개인숭배와 대약진을 비판한 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원고가 발각되어 10년 동안은 실형까지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1980년 64살의 나이로 복권 된 김학철은 집필을 재개하여 ―2001년 세상을 뜰 때까지 ― 단편소설 20여 편, 단행본 8권, 수필 300여 편을 더 남겼다.
김학철은 그 마지막도 고고하고 의연했다. 겨드랑이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21일간 곡기를 끊어 85살로 생을 마감하며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서리처럼 맑고 차가운 기상을 간직했다고 한다.
김학철이 조선의용대 시절 즐겨 읊었던 비장미 넘치는 페퇴피 샨도르의 시 ‘민족의 노래’와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두 아들에게 남겼던 유언을 소개한다. “민족의 노래//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윤봉길 의사의 유언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Napoléon)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Edison, Thomas Alva)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와 페퇴피 샨도르가 각각 25살 때였으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쓴 이상화 시인도 당시 25살이었다.
지금까지 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았다. 해리 리버만이나 시바타 도요의 경우에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행운과 맞닥뜨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나름대로 목적과 이상이 없었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학철의 경우에는 좀 더 극적인 경우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시 한 편, 글 한 구절이 얼마만큼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웅변으로 역력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람이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나이가 적다거나 많다는 것, 혹은 신체적 제약이 얼마만큼 핸디캡(handicap)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 어떤 상황이나 경우에도 자신의 의지나 신념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김학철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몸소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내가 수필 작가가 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전혀 예기치 않은 일과 맞닥뜨릴 때가 가끔 있다. 나도 그랬다. 45살 되던 해로 기억된다. 아내와 갈등이 생겼는데 도무지 그 골이 메워지지 않았다. 스스로 나름 설득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 끝에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말보다는 아무래도 글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편지를 쓰다가 문득 떠올린 생각이 그동안 까맣게 잊어버렸던 중학교 시절의 꿈이었다.
중학교 때의 꿈은 소설가였다. 항상 가방 속에 습작 노트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편지를 쓰면서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 설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 이렇게 잊고 있었지. 그래, 지금이라도 한번 해보자.’ 그러나 생각은 생각에 머물 뿐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던 2002년 어느 날 일간신문에서 소설가 지망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발견했다. 그곳이 바로 대구에서 유일하게 소설 창작을 지도했던 ‘반월소설교실’이었다.
2002년은 정말 월드컵 축구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웠던 한 해였다. 소설에 대한 열정은 50살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3월 개강하여 7월까지 5개월 동안 ― 매주 화요일마다 ―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소설 문학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소설 창작은 생각만큼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자질이 부족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2004년 ‘제7회 공무원문예대전’에 시험 삼아 응모했는데 뜻밖에 수필 부문 장려상을 수상했다. 무척 기뻤다. ‘그래도 문장력은 인정을 받았다.’라는 성취감과 자신감에서였다. 그때부터 대구시청 문우회원으로 활동하며 1년에 적게는 서너 편, 많게는 십여 편에 이르는 수필을 꾸준히 썼다.
해마다 연말이면 각 기관 또는 단체마다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나도 2008년부터 나름대로 혼자만의 사자성어를 정하고 실천하기로 했다. 2008년은 건곤일척(乾坤一擲)으로 정했다. 이왕 쓰는 글 그럴듯한 문학상이라도 한번 타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정말 주사위를 던지듯 심혈을 기울여 몇 군데 응모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2009년도에는 다시 도전한다는 의미의 권토중래(捲土重來)로 정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드디어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자격이 주어지는 ‘제19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최우수상에 선정되었다. 상금도 3백만 원이나 탔다. 2010년도에는 초연함을 의미하는 목계양도(木鷄養到)로 정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다시 ‘제10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였고 2백만 원의 상금까지 탔다. 스스로에게 작가의 호칭을 부여할 만큼 정말 기뻤다.
2011년도의 사자성어는 절음(節飮)과 항심(恒心)이다. 고교 시절부터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52살 때쯤 끊을 수 있었으나 술은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았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술 마시는 양을 알맞게 줄인다는 절음과 늘 떳떳한 마음을 지닌다는 항심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게 2011년은 숨을 고르는 한 해가 되었다. 계속해서 수필을 쓸 것인가 어쩔 것인가 또 쓴다면 어떤 수필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심과 소설에 대한 구상도 진지하게 해보았다.
2012년도의 화두는 ‘이십년(二十年), 그 새로운 시원(始原)’으로 정했다. 정년을 마무리하고 줄잡아 20년쯤을 제2의 인생으로 보고 그 기틀을 닦는 해로 정한 것이다. 거기에 맞춰 정년을 맞는 12월에 출판기념회를 갖기로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2012년 12월, 수필집 ‘다시 개울을 건너 언덕에 올라’의 출판기념회 겸 정년 퇴임식을 가졌다.
나의 꿈은 아직 진행형이다. 해리 리버만이나 시바타 도요는 차치하더라도 김학철도 64살이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음이다. 해리 리버만이나 시바타 도요에 비하면 나는 아직 청년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비록 내가 대한민국에서 정점을 차지하거나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독창성 있고 색깔이 분명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인다고 해서 다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보이고 꿈과 열정이 있어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2014년 2월, 방송대학교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이룬 결실이다. 처음에는 30대 후반 국어국문학과에 도전을 했었고 두 번째는 40대 후반 중어중문학과에 도전을 했었다. 두 번 모두 한 학기를 넘기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학우들보다 스스로 나이가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50대 후반 세 번째로 도전한 문화교양학과에서는 나이가 가장 많은 층임에도 부끄러움 없이 공부를 잘했다. 또한 각종 학교 행사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앞서 이야기 한 김학철도 실은 방송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람이다.
나는 반생 너머를 소방에서 보냈다. 1976년 6월 소방에 첫발을 디딘 후 2012년 12월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36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소방에서 보낸 것이다. 돌아보면 고뇌와 가슴 아픈 순간들도 있었고 보람과 격정의 순간들도 있었다.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은 2003년 2월 18일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다. 당시 구조구급계장의 직책으로 3일 밤낮을 현장지휘소에서 근무를 하며 그때만큼 소방공무원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좌절과 고뇌, 한계와 비애,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소방공무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너무도 미약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쉽고 미진한 부분 또한 없지는 않다. 대내적으로 소방 조직을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세련되고 지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점 등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자긍심 또한 강했다. 나는 소방에서 정점에 이르지 못했다. 어쩌면 맥아더의 말처럼 나의 목적과 이상의 목록에서 서장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구라도 서장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목적과 이상의 목록 속에 반드시 서장이라는 단어를 넣어 주기 바란다. 대신 나는 나의 목적과 이상의 목록 속에 작가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필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였다. 스스로를 평가해 보면 어느 정도 리더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분히 정의로운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직장 생활을 하며 누군가에게 “좋은 게 좋은 거야. 공연히 정을 맞을 필요가 있나?”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 괴리감에서 오는 갈등과 모순 사이에서 언제나 번민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이 마치 “혼자 잘난 척 하지마라. 대세를 따르는 것이 정도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abraxas)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기도 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배낭에 가장 많이 들어있었다고 하는 헤세(Hesse, Hermann)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계기에 다다랐을 때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알 속에 머무르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찾아 과감히 알을 깨고 뛰쳐나오는 도전의 용기도 필요한 것 같다.
불가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시작된 중국의 선종(禪宗)은 당나라 때 육조대사(六祖大師)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떨치게 되는데, 제5조 홍인대사(弘忍大師)로부터 의발(衣鉢)을 물려받은 혜능선사는 당시 일자무식인 나무꾼인데다 20대의 약관이었다고 한다. 이후 혜능선사는 홍인대사의 다른 제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다.
어느 날 절에서 승려들이 다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당간지주의 깃발을 보고 한쪽 편 승려들은 “바람이 흔들린다.”라고 했고, 다른 편 승려들은 “깃발이 흔들린다.”라고 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게 바로 15여 년의 은둔 생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혜능선사의 제일성이었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람과 깃발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시대와 세대를 불변하여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정의보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 해피니스(happiness)의 번역어인 행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로 풀이하고 있는데, 원래는 “선한 신이 지켜주는 마음의 평화”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행복의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했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인(仁)의 마음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사랑을, 불교적 관점에서는 자비를 행복 실현의 요체로 보았고, 플라톤(Platon)은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상태를 행복의 요체로 보았으며, 공중적 쾌락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행복의 원리로 제시하였다.
요즘도 계룡산에는 도인(道人)들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도인에게 “마음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이라는 대답을 했고, “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눈에 보이는 마음”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어느 칼럼에 나오는 그 글을 읽으며 나는 그 사람은 정말 도인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상에 명상을 거듭하지 않고서는 금방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일치할 때 가장 치열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또 행복이라는 실체가 상대적인 개념보다는 절대적인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행복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행복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만족의 자기 평화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타적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종심(從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이 칠십을 달리 이르는 말로 공자(孔子)가 “일흔에 마음대로 하여도 법도를 그르치지 않았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공자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15세를 지학(志學)으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30세를 이립(而立)으로,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40세를 불혹(不惑)으로, 하늘의 뜻을 알았다는 50세를 지천명(知天命)으로, 귀로 들으면 바로 그 뜻을 알았다는 60세를 이순(耳順)으로 명명하였다.
공자의 지론에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환갑을 맞으면서 스스로 불편한 심기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공자의 말대로라면 이미 하늘의 뜻을 아는 단계를 지나, 어떤 말을 들어도 바로 그 뜻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어야 마땅한 나이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끌어올리고 후하게 치켜세워 보아도 공자의 견해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했다. 재삼재사 숙고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후 이제 겨우 불혹에 이르렀다는 판단을 내렸다. 곰곰이 따져보니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 오순이 넘어 작가의 세계로 들어섰으니 학문의 기초를 확립한 이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순이 넘어 작가로서의 마음을 굳혔으니 판단에 미혹됨이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다른 작가들에 비하여도 또 공자의 정의에서도 정확히 20여 년을 뒤처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莊子)의 인간세편(人間世篇)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이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때로는 더 유용하다.”는 의미다. 물론 유용과 무용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처럼 철저히 인간의 관점이기는 하다. 그러나 활달하고 풋풋하게, 풋풋하고 활달한 기상으로 구십 살까지는 꼭 살아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칠십이 되어서는 지천명의 경지를, 팔십이 되어서는 이순의 경지를, 구십이 되어서는 종심의 경지를 느낄 수 있는지 어떤지 스스로 확인해 볼 생각이다. 내가 구십 살까지 살아보기로 단단히 작정한 이유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말이다. 시간과 공간의 일회성과 불가역성에 대한 통찰적 의미이지만, 나는 오늘 이 말을 인연의 소중함으로 재해석하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우리가 같은 강물 속에 모두 함께 발을 담글 수 있는, 오늘과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의 인연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을 통한 인연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망설이며 머물거나 주저하며 안주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싶다. 일률적이며 획일적인 틀을 벗어나 그 무엇이라도 한 번은 꼭 시도해 보라는 조언이기도 하다. 스물에는 스물의 꿈과 사랑이 있고 서른에는 서른의 꿈과 사랑이 있듯이, 쉰에는 쉰의 꿈과 사랑이 있고 예순에는 예순의 꿈과 사랑이 있는 법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대교 경전 주석서인 미드라쉬(Midrash)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다윗(David) 왕이 보석 세공인을 불러 자신에게 어울리는 크고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반지에 자신이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또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게 하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보석 세공인이 솔로몬(Solomon)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 왕자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얼마 후 반지를 받아든 다윗 왕은 크게 기뻐했고 보석 세공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04년도 숭산(崇山)스님이 입적하기 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남긴 말을 전하며 글을 접는다. 숭산스님은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많이 알려진 승(僧)으로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파란 눈의 승려 현각의 스승이기도 하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산은 항상 푸르고 물은 흐른다// 왔다가 가는 길이 아니요/ 있다가 없어지는 길이 아니다/ 오직 자연 그대로 일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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