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낮게 두 번 울렸다. 문자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신호였다. 휴대폰을 집는 대신 몸을 돌려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 5시 30분,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새벽 2시 7분, 유학 중인 딸아이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아빠, 요즘 힘들어 죽겠어요. 삶에 애착이 안 가요. 모두가 엉켜 버렸어. 제가 잘못된 건가요?”
나는 산길을 좋아한다. 특히 우울한 무력감에 젖어 있을 때 더 그렇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혼란한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깊어지는 숨소리만큼이나 마음이 단정해지는 것이다. 몇 날 며칠 혼자라도 혼자가 외롭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걷다 보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나무가 있다. 제법 굵고 커다란 나무도 있고 가늘고 작달막한 나무도 있다. 쭉 뻗은 곧은 나무도 있고 이리저리 굽은 나무도 있다. 때로 그 나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 온다. 왜 걷는가. 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처럼 걸어야 하는가. 사춘기 때부터 이어져 온 케케묵은 미완의 숙제였다.
드디어 오늘 산길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나무는 의연하고 당당하다. 곧은 나무는 곧은 나무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대로, 굵은 나무는 굵은 나무대로 가는 나무는 가는 나무대로 저마다 의연하고 당당하다. 나무의 삶과 인간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 나무가 묵묵히 살아가듯 인간도 그냥 묵묵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가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인생이다.’
보름 전 주말 고향을 다녀왔다. 이런 일 저런 일로 간혹 고향을 찾았으나 중학교 동창 모임은 처음이었다. 운전 중 풍경을 따라 40여 년 전 얼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12시 조금 넘어 도착한 허름한 식당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사내들이 여남은 둘러앉아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추어탕을 안주 삼아 소주 몇 잔 마시고 헤어지는 발걸음이 허공을 밟은 듯 휘청거렸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아니면 여자 동창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였을까. 3시간 남짓 달려온 환상이 허무의 그림자 속으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갔다.
고향인 충북 진천에는 고종제가 살고 있다. 동창들과 헤어져 10살 아래인 고종제와 증조모 산소로 향했다. 추석 벌초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선영이었다.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자 거대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산소가 보이지 않았다. 현장 소장이 무연고 묘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월요일에야 소재 파악이 가능하다는 말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고종제의 집은 면소재지에서 오 리쯤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동물의 왕국이었다. 개가 11마리, 토종닭이 4마리, 오리가 6마리, 고양이가 3마리였다. 고종제가 오리 한 마리를 잡았다. 얼마 후 청주에 사는 고종형이 내려왔다. 나보다 7살 위인 고종형은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채 머슴살이로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다. 더없이 착한 사람이었다. 노동판을 전전한 탓일까. 10여 년 만에 만난 고종형은 말끝마다 상소리를 빠뜨리지 않았다. 나이 탓인지 더없이 사나운 기질을 나타냈다. 고종제의 말이다. 형제 중 고등학교를 나온 건 자기 뿐이니 져주면서 산다고 했다.
다음 주 월요일 고종제에게 전화가 왔다. 충남 금산군 일불사에 증조모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2살 위인 형과 일불사를 향했다. 10여 년 만의 동행이다. 은연중 하나둘 사소한 견해차가 빚어지기 시작했다. 고종제를 만나 서류를 확인해 보니 틀림없는 증조모 유골이었다. 늦은 점심 식사를 하며 형은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였다. 고향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구월 첫째 일요일 동문 체육대회를 하는데 바로 내일이 그날이었다. 말이 체육대회지 모교 운동장에 기수별로 천막을 치고, 먹고 마시며 정을 나누는 자리였다. 보름 전 고향에 다녀와 내키지 않았으나 형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전부인 고향이었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4시 30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수탉 2마리가 번갈아 울어대니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부스스 일어난 개가 인사 대신 목청껏 짖는다. 한 마리가 짖자 11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어댄다. 수탉은 여전히 울어대고,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그야말로 왁자하다. 고종제가 밖으로 나와서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졌다.
닭장에 암탉과 수탉이 각각 두 마리씩 들어 있었다. 먼젓번과 달리 자세히 들여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암탉 한 마리가 등에 털이 뽑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수탉 두 마리가 번갈아 올라타고 짝짓기를 한 탓이라는 고종제의 말이었다. 멀쩡한 암탉은 어미닭이라고 한다. 어미닭 한 마리와 병아리 일곱 마리를 얻어 왔는데 병아리 네 마리는 고양이에게 죽었다고 했다. 장성한 수탉들이 용하게 어미닭을 알아보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닭에게도 도(道)가 있단 말인가.
다음날 모교 운동장을 찾아가니 천막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부터 경로석으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형은 아예 동창생을 만나지 못했고 나는 몇몇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다. 격세의 씁쓸한 여운이 사뭇 맴돌았다.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차선을 변경하다 하마터면 사고를 낼 뻔하였다. 순간 느닷없이 형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식은땀과 안도의 숨소리 너머로 고종형의 얼굴이 얼핏 스치고 지나간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달생(達生) 편에 목계양도(木鷄養到)라는 말이 나온다. 수양의 도가 절정에 이르면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초연해진다는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선왕은 투계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뛰어난 닭을 한 마리 구한 선왕은 기성자(紀誠子)를 찾아가 투계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기성자는 당대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다.
열흘이 지난 뒤 왕이 물었다. “닭이 싸울 만한가?”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나 교만하여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열흘 뒤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다. “이제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완전히 평정을 찾았습니다. 마치 목계(木鷄)처럼 되었습니다. 닭의 덕이 완전해져 이제 다른 닭들은 그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기성자는 최고의 투계를 만드는데 40여 일이 걸렸다. 그렇다면 목계양도의 경지는 과연 얼마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야 완성할 수 있는 걸까.(끝)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 속에 비친 풍경 (0) | 2020.11.04 |
---|---|
아버지의 성(城) (0) | 2020.11.01 |
귀가 얇은 남자 (0) | 2020.10.27 |
산에는 그림자가 있다 (0) | 2020.10.16 |
저녁노을에 물든 서정 (0) | 2020.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