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늘 돌고 변화를 거듭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같을 수 없다. 낮과 밤이 다르고 봄여름 갈 겨울, 철마다 철이 다르다. 다름없어 보여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고 관념과 행동에 따라 변화한다. 기후와 풍토에 따라 달라지고 성별과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눈도 못 뜬 채 꼼지락거리던 붉은 덩어리가 어느덧 자라 창공을 날아오른다. 이윽고 어미 곁을 떠난 새는 본능적으로 짝을 지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게 된다. 이것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새의 일상이자 일생이다. 본능에 잠재된 자연의 철리인 것이다.
사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새는 본능에 의한 행동을 하나 사람은 사유와 판단에 의한 행동을 한다. 새는 바람처럼 걸림이 없으나 사람은 선과 악의 개념, 양심과 정의의 척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 자연의 순리에서 그만큼 멀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새도 사람도 그 일상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마찬가지다.
사람의 일상은 단순하다. 아침에 잠을 깨어 세끼 식사를 하고 활동을 하다가 밤에 잠자리에 든다.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하루하루가 바로 사람의 일상인 것이다. 물론 생활 패턴에 따라 낮과 밤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름없어 보이는 이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로 천양지차의 간극을 보이기도 한다. 신분과 재물에 따라 명분과 실리에 따라 그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사람은 공평한 존재가 아니다. 그 성취에 따라 신(神)에 버금가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벌레보다 하찮은 개체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의 명령과 조종에 따라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배우고 익히며 창조와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절대적 과제이자 명제다. 모략중상과 배은망덕은 물론 살인과 전쟁마저 불사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시공이 달라지면 의식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거지의 상황과 인식이 같을 수 없다. 청소년기의 사고가 장년이나 노년까지 이어질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이가 많아진다는 현실이 꼭 관대함으로 관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오불관언의 사고가 더 강해져 지극히 사납고 편협해질 수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이 말의 진정성 때문에 사뭇 고뇌에 빠져든 적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바위가 나무로 변하고, 나무가 바위로 변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구절이 ‘수신치국평천하제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가져 본 적이 있다. 일본에는 수신과 치국을 별개의 논거로 아예 도덕과 정치를 분리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수신제가를 못해도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 17세기 일본의 유학자였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무엇일까.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순응과 인간의 도리에 따르는 순리가 기본일 것이다. 그러나 순응과 순리에 의한 양심과 정의보다 파렴치한 불의가 기승을 부리고,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세상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인간말짜도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볼 때는 자신이 주인공이고 착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나쁘다. 그러나 그 늑대보다 더 나쁜 놈이 늑대 탈 쓰고 돌아다니며 사기치고 공갈치는 양이란 놈이다. 인류의 역사는 명분과 실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분에 너무 매달리면 고루해지고 실리에 너무 집착하면 비루해진다. 절제의 도(道)와 조화의 미(美)가 절실히 요구되는 까닭이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다. 한낱 미물인 여우가 그럴진대 사람은 오죽할까. 사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정신이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하나하나 버리고 지우다 보면 마지막으로 남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게 된다. 경우에 따라 자식보다 동 시대의 곱게 늙어 가는 이웃이 더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살아 숨 쉬는 그 자체가 도(道)가 되고 자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사위어가는 저녁노을은 상징성과 신비감 또는 황홀감을 떠나 그 존재성만으로 가치가 있다. 아버지의 성(城) 또한 마찬가지다. 허물어진 담장은 허물어진 담장대로 말라죽은 나무는 말라죽은 나무대로, 바닥을 드러낸 샘은 바닥을 드러낸 샘 그대로 놓아두고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더 자식다운 도리인지도 모른다. 그럼 또 누가 알겠는가. 어느 날 문득 고목에 새잎이 돋아나고 메마른 샘에 물이 가득 고이는, 제행무상이 다시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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