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는 가을날 들녘 한가운데 서 있어야 제격이다. 아스라이 넓디넓은 황금빛 벌판 위로 비스듬히 햇살이 기울고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나타날 때면, 그 모습은 장엄함을 넘어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다. 봄날의 허수아비는 잔망해 보이고 여름날 허수아비는 멋쩍어 보이며, 겨울날 허수아비는 노쇠한 황량함이 있다.
친구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였다. 중학교 때 추억을 회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만 공부를 조금 잘했고 몸이 약했으나 다분히 오기가 있어 성격이 강퍅했던 모양이다. 어릴 적 별명이 오뚝이였다. 그때도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체육 시간 나무 그늘에서 혼자 책을 읽던 기억으로 미루어 그렇다.
손재주도 무디게 타고났다. 초가집에 살던 그 시절 아이들은 지붕에서 잠자는 참새를 잘도 잡고 매미도 잘 잡았으며, 싸리나무로 만든 낚시로 방죽에서 붕어도 곧잘 잡았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루는 밤이 이슥해 사다리를 걸쳐놓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가르쳐 준대로 서까래 아래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쥐에게 손가락을 깨물리고 말았다. 이후 두 번 다시 참새를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 학교 친구들과 환갑이나 결혼 잔치 등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술과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래들은 한두 잔에 나가떨어졌으나 나는 서너 잔에도 끄떡없었던 것이다. 두세 살 위인 동네 친구들과는 삼사십 리 떨어진 마을로 원정 서리를 다녔다. 사오 일에 한 번쯤, 닭과 토끼를 잡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망을 보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때 살던 곳이 달성공원 뒷담 쪽 동네였다. 당시 공원 뒷담 길은 소위 논다는 껄렁패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던 곳이었다. 공원 뒷담 모퉁이로 접어들어 집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여야 했던가. 한두 번 불려 다닌 후 주머니에 연필 깎는 칼을 넣고 다니게 되었다. 아무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기본 사고를 바꾸어 주었다. 데미안을 읽고 주머니에서 칼을 버렸다.
삼복더위 때 논산 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염천의 땡볕 속이었지만 무리를 지어 걸으면 저벅저벅 소리가 났다. 땀이 흘러 길을 적셨던 것이다. 철책선 벙커(bunker) 생활은 말 그대로 개와 돼지의 삶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한겨울 속옷에선 쌀알만 한 이가 끊이지 않았다. 여러 벌 옷을 껴입었으나 무릎까지 빠지는 눈과 뼈를 깎는 삭풍 속 추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추위 속 한밤중 철책선 보초 근무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리게 하였다. 버쩍 마른 몸이었으나 그래도 지푸라기나 강아지와 한 무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두 사람 얼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으로 정도 이상 많은 애정을 받았다. 그렇게 중학교 입학 때 수석을 차지했으나 이후 빠른 속도로 기억에서 멀어졌다.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를 가르치던 여선생이었다. 안경을 쓰고 키가 작은 그는 전형적인 히스테리 형이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지능지수가 높다는 것과 국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었다.
산이 스승이 되었다. 서른다섯 살 때 승진 시험공부를 하며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었다. 1년 남짓 지나자 버쩍 마른 몸이 평균치로 돌아섰다. 서른일곱 살 되던 가을로 기억된다. 삼십여 명이 등산을 갔는데 제일 뒤에 처져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젊은 친구는 젊은 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대로 잘도 올라가는데 하늘이 노래졌다.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으로 쓰러져 한참을 엎드려 있어야 했다. 주말부터 혼자 산 타는 연습에 들어갔다. 지금은 쉬지 않고 내처 걸어 30분쯤 걸리는 길을 네 번이나 쉬며 간신히 올라갔다. 1시간 넘게 걸렸다. 그때를 시작으로 산이 스승이 되었다. 산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약한 몸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그를 스승이라 부르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인용한 사무엘 울만의 시 귀절이다. “단순히 오래 산다고 해서 사람이 늙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늙어 가는 이유는 목적과 이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할 뿐 영혼마저 주름지게 하지는 못한다. 영혼을 흙으로 되돌리는 것은 긴 세월이 아니라 의심, 두려움, 절망 같은 것들이다. 믿는 만큼 젊어지고 의심하는 만큼 늙으며, 자신감을 갖는 만큼 젊어지고 두려워하는 만큼 늙으며, 희망하는 만큼 젊어지고 절망하는 만큼 늙는다. 늙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사고에 달려 있다.” 그렇다. 나이가 많다는 건 자랑이 될 수 없으나 부끄러운 건 더더욱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목표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패기 그리고 그에 상응한 집념과 도전 의식일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다.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이게 바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타도하고 득의의 절정에서 고향에 돌아와, 동네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른 대풍가(大風歌)라는 노래라고 한다. 그의 됨됨이는 알 수 없으나 사내대장부의 웅장한 기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우물은 그와 다르니 그와 같은 색상을 지닐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건 어느 대상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집념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그에 견주어 그에 걸맞은 노래를 한번 불러 볼 것이다. 이불 속이 아닌 무대에서 말이다.(끝)